
들어가며
유럽연합(EU)이 20년 만에 의약품 규제를 크게 바꾸고 있습니다. 이른바 EU 의약품 패키지입니다. 2025년 12월에 유럽의회와 이사회가 큰 틀에 합의했고, 2026년 3월에 최종안이 공개되었습니다. 정식 확정은 2026년 가을쯤으로 보이며, 그 뒤 약 2년이 지나 실제로 적용될 전망입니다.
이 변화는 규제 부서만의 일이 아닙니다. 보호기간, 출시 의무, 공급 규칙이 바뀌면 계약서에 적힌 돈 계산과 책임 배분도 함께 바뀌기 때문입니다. 한국 기업이 유럽 회사와 라이선스·공동개발·공급 계약을 맺을 때, 어느 조항을 다시 봐야 하는지를 하나씩 짚어 보겠습니다.
1. 보호기간 조항 — 이제 “고정값”이 아닙니다
신약은 일정 기간 동안 복제약(제네릭·바이오시밀러)의 진입을 막는 보호기간을 받습니다. 계약에서는 보통 이 기간을 기준으로 로열티를 언제까지 받을지, 마일스톤을 언제 지급할지를 정합니다. 그런데 새 규칙에서는 이 기간이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핵심만 보면 이렇습니다. 자료보호 8년은 그대로지만, 그다음 시장보호가 기존 2년에서 1년으로 줄었습니다. 대신 일정 조건(예: 미충족 수요 해결, 여러 EU 국가에서 임상 수행 등)을 충족하면 1년씩 더 받을 수 있고, 전부 합쳐 최대 11년까지만 인정됩니다. 한마디로, 보호기간이 “회사가 무엇을 어디서 했느냐”에 따라 늘기도 줄기도 하는 변수가 된 것입니다.
계약에서 확인할 점
• 로열티 기간이나 마일스톤을 “보호기간이 몇 년이다”라고 고정해 적지 마십시오. 늘어날 때와 줄어들 때를 모두 가정해 둡니다.
• 보호기간이 늘면 추가 보상을, 줄면 금액 조정하는 연동 장치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2. 노력 의무 조항 —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충돌할 수 있습니다
새 규칙은 회사에 제품을 공급할 법적 의무를 지우면서 “책임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계약서에도 흔히 “최선의 노력” 또는 “상업적으로 합리적인 노력”이라는 말이 들어갑니다. 문제는, 법이 요구하는 수준과 계약이 정한 수준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자칫 법이 더 무거운 의무를 지우는 상황이 생깁니다.
계약에서 확인할 점
• “노력”이라는 말을 막연히 두지 말고, 무엇을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적습니다.
• 법적 공급 의무 때문에 생기는 추가 부담을 누가 질지 분명히 합니다.
3. 출시·공급 책임 조항 — “어느 나라를, 누가” 맡는가
새 규칙에서는 EU 어느 회원국이 요청하면, 회사는 그 나라에 충분한 물량을 공급할 의무가 생깁니다. 이를 지키지 못하면 그 나라에서는 보호기간이 일찍 끝나 경쟁사가 먼저 들어올 수 있습니다(자료상 3년간 공급에 실패한 경우). 지금까지는 큰 시장부터 차례로 출시하는 전략이 흔했는데, 그 자유가 줄어듭니다.
여러 회사가 나라별로 권리를 나눠 갖는 계약에서는 이 문제가 특히 복잡해집니다.
계약에서 확인할 점
• 어느 당사자가 어느 나라의 출시·공급을 책임지는지 명확히 나눕니다.
• 공급을 못 해 보호기간을 잃었을 때의 손실을 누가 부담할지 정합니다.
• 한 나라의 낮은 가격이 다른 나라 가격에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그 부분도 다룹니다.
4. 공급망·품절 조항 — 협상 초반에 다뤄야 합니다
회사는 앞으로 품절을 예방할 계획을 세우고,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 미리 당국에 알릴 의무를 집니다(예상되는 품절은 원칙적으로 최소 6개월 전 통지, 제품을 영구 철수할 때는 더 긴 사전통지). 그래서 예전에는 나중에 보던 공급·생산 문제를 계약 협상 초반부터 따져야 합니다.
계약에서 확인할 점
• 생산능력, 원료 조달처, EU 안에서의 공급 역량을 미리 확인합니다.
• 품절 예방 계획과 당국 통지를 누가 책임질지, 정보는 어떻게 공유할지 정합니다.
• 공급이 끊겼을 때의 책임과 구제 방법을 적어 둡니다.
5. 유통·세무 구조 조항 — 스위스 법인 경유 방식에 제동
많은 회사가 제품을 EU에서 만들어 출하한 뒤, 세금 문제로 EU 밖(주로 스위스) 법인이 소유권을 갖고, 판매할 때 현지 계열사로 소유권을 넘기는 구조를 씁니다. 새 규칙은 EU 안의 도매·유통 회사가 EU 도매허가나 제조허가를 가진 곳에서만 제품을 들여올 수 있다고 분명히 했습니다. 즉 스위스 법인을 끼운 기존 방식이 막힐 수 있습니다.
계약에서 확인할 점
• 공급계약의 소유권 이전 방식과 당사자가 새 허가 요건에 맞는지 봅니다.
• 보유한 허가의 종류와 주체를 확인하고, 필요하면 구조를 다시 짭니다.
• 구조를 바꿀 때 따라오는 세금 문제를 미리 검토합니다.
6. 가치 평가·후속 전략 조항 — 경쟁사가 더 일찍 들어옵니다
이번 개편으로, 복제약 회사가 보호기간이 끝나기 전에 임상뿐 아니라 약가·급여 신청, 입찰 준비까지 특허 걱정 없이 미리 할 수 있게 됩니다. 그 결과 보호기간이 끝나는 바로 그날 경쟁사가 시장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계약에서 확인할 점
• 자산 가치나 로열티를 계산할 때 가정한 “보호기간 후 매출”을 다시 점검합니다.
• 마일스톤이 보호기간 종료와 연결돼 있다면, 일부 나라에서 보호가 먼저 끝났을 때를 대비합니다.
7. 양도·자산 조항 — 새로 생긴 “바우처”라는 자산
내성균 대응에 필요한 우선 항생제를 개발하면, 양도 가능한 바우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바우처는 자사 제품에 쓰거나 다른 회사에 팔 수도 있어, 그 자체가 사고팔 수 있는 자산입니다(단, 매출이 아주 큰 블록버스터에는 쓸 수 없습니다).
계약에서 확인할 점
• 바우처가 생길 수 있는 거래라면, 누가 그것을 갖고 쓰거나 팔 권리가 있는지 적습니다.
• 바우처의 가치를 거래 대가에 반영할지 검토합니다.
8. 법령 변경·준수 조항 — 변화를 흡수할 장치
규제가 계속 바뀌는 상황에서는, 기본 문구만으로 부족할 수 있습니다.
계약에서 확인할 점
• 법이 바뀌어 보호기간·공급 조건이 크게 달라지면 다시 협상하거나 금액을 조정하는 절차를 넣습니다.
• “법을 지킨다”는 문구가 새로 생긴 공급·통지 의무까지 포함하는지 봅니다.
• 적용일 전에 허가를 신청한(신청서를 제출한) 제품에는 옛 규칙이 적용되므로, 신청 시점 전략을 검토합니다.
맺으며
이번 개편의 메시지는 이제 허가 전략과 영업 전략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보호기간이 “EU 곳곳에 실제로 제품을 공급하고 있느냐”와 연결되면서, 계약의 돈 계산과 책임 배분도 함께 손봐야 합니다. 유럽을 대상으로 한 계약이라면, 위 조항들을 협상 테이블에 미리 올려 두는 것이 나중의 분쟁과 손실을 줄이는 길입니다.
다만 이 법은 아직 최종 확정 전 단계이므로, 구체적인 숫자와 조문 해석은 최종 공식 문서를 기준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일반적인 정보 제공을 위한 것으로, 개별 사안에 대한 법률자문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계약·거래는 별도의 자문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참고 자료
- 유럽이사회(EU Council) 보도자료 — 합의의 공식 발표. 자료보호 8년·시장보호 1년, 공급 의무, AMR 바우처 등
https://www.consilium.europa.eu/en/press/press-releases/2025/12/11/pharma-package-council-and-parliament-reach-a-deal-on-new-rules-for-a-fairer-and-more-competitive-eu-pharmaceutical-sector/ - 유럽의회(European Parliament) 보도자료 — 희귀의약품 독점기간, 볼라 예외 확대 범위 등
https://www.europarl.europa.eu/news/en/press-room/20251209IPR32110/deal-on-comprehensive-reform-of-eu-pharmaceutical-legislation
Deal on comprehensive reform of EU pharmaceutical legislation | News | European Parliament
Early morning on Thursday, co-legislators reached a provisional agreement on revamping the EU’s pharmaceutical policy framework, to boost competitiveness, innovation and security of supply.
www.europarl.europa.e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