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며
2026년 2월 27일, 영국 항소법원(Court of Appeal)은 제약·바이오·IP 라이선스 실무에 중요한 함의를 갖는 판결을 선고하였습니다. Zaha Hadid Limited v. The Zaha Hadid Foundation [2026] EWCA Civ 192 사건이 그것입니다.
이 사건은 세계적 건축가 고(故) 자하 하디드 여사의 이름을 둘러싼 상표 라이선스 분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판결의 법리적 핵심은 건축업계를 훨씬 넘어섭니다. 계약서에 라이선시(licensee)의 해지권이 명시되어 있지 않은 "기간 불확정(indefinite)" 라이선스 계약에서, 라이선시는 합리적 통지(reasonable notice)를 통해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가? 이것이 본 판결이 답한 질문입니다.
사건의 배경
2013년, 자하 하디드 여사는 자신이 설립한 건축 법인 Zaha Hadid Limited(이하 "회사")와 상표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계약의 내용은 'ZAHA HADID' 상표를 회사가 사용하는 대가로 연간 순이익의 6%를 로열티로 지급하는 것이었습니다. 2016년 하디드 여사가 사망한 후, 해당 상표의 권리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Zaha Hadid Foundation(이하 "재단")으로 이전되었으며, 재단이 라이선서 지위를 승계하였습니다.
문제는 계약서의 해지 조항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계약 제12조는 라이선스가 "조기에 해지되지 않는 한 기간 불확정으로 존속한다(shall continue indefinitely, unless terminated earlier)"고 규정하면서, 해지권을 라이선서(하디드 여사, 이후 재단)에게만 부여하고 라이선시(회사)의 해지권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2024년 3월, 회사는 12개월 전 통지를 제공하며 계약 해지를 시도하였습니다. 재단은 회사에게는 해지권 자체가 없다며 이를 거부하였고, 소송이 제기되었습니다.
하디드 여사 사망 이후 2018년부터 2024년까지 회사가 재단에 지급한 로열티 총액은 약 2,140만 파운드(한화 약 390억 원)에 달하였습니다.
고등법원의 판단 (원심, 2024년 12월)
원심 Adam Johnson 판사는 회사의 청구를 기각하였습니다. 법원은 계약의 해지 조항이 라이선서에게만 해지권을 부여하고 있으므로, 회사는 재단이 해지하기 전까지 계약에 영구적으로 구속된다고 보았습니다. 회사의 예비적 주장인 영업 제한(restraint of trade) 법리 위반 주장도 배척하였습니다. 법원은 계약이 회사에 상당한 상업적 가치를 제공하였으며, 로열티 지급 의무와 기타 조건들은 재단의 정당한 이익 보호를 위해 상업적으로 합리적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항소법원의 판단 (2026년 2월 27일)
항소법원(Chancellor of the High Court, Lord Justice Popplewell, Lord Justice Peter Jackson으로 구성)은 원심을 파기하고 회사의 항소를 인용하였습니다.
핵심 법리: "indefinitely" ≠ "perpetually"
항소법원은 계약서에 사용된 표현이 "영구적으로(perpetually)"가 아니라 "기간 불확정으로(indefinitely)"라는 점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법원은 이 두 개념이 법적으로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고 명확히 하였습니다.
기간 불확정 계약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 종료될 수 있음을 전제합니다. 영구적 계약은 당사자들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영원히 구속합니다. 계약서상의 "indefinitely"는 후자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Winter Garden Theatre v. Millennium 판결의 2단계 분석틀 적용
항소법원은 1948년 귀족원(House of Lords) 선도 판결인 Winter Garden Theatre (London) Ltd v. Millennium Productions Ltd [1948] AC 173에서 확립된 2단계 분석틀을 적용하였습니다.
1단계: 당사자들이 계약을 영구적(perpetual)으로 존속시키려는 의도였는지, 기간 불확정(indefinite)으로 존속시키려는 의도였는지를 판단한다.
2단계: 기간 불확정으로 판단되는 경우, 합리적 통지에 의한 해지권은 계약 해석(construction)의 결과로서 도출된다.
항소법원은 상업적 당사자들이 서로를 영구적 관계에 구속시키려 했을 것이라고 볼 근거가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판결문에서 법원은 다음과 같은 점을 들어 영구적 구속을 부정하였습니다.
"계약 체결 후 수십 년, 또는 수백 년에 걸쳐 브랜드 가치를 훼손할 수 있는 사정이 발생할 수 있다. 예컨대 자하 하디드의 상징적 건축물에 구조적 결함이 발생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건축 양식은 기술과 미적 감각의 변화에 따라 변한다. 당사자들이 회사를 100년 후에도 하디드 여사의 건축적 정체성을 홍보할 의무에 구속시키려 했다고 볼 수 있는가?"
법원은 이러한 상업적 맥락을 고려할 때, 계약 해석상 모든 당사자에게 합리적 통지에 의한 해지권이 인정되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항소법원은 해지권이 묵시적 조항(implied term)으로 볼 여지도 있으나, 그보다는 계약의 진정한 해석(true construction)으로부터 직접 도출된다고 보았습니다.
영업 제한 법리 판단은 유보
항소가 계약 해석 쟁점에서 인용되었으므로, 법원은 영업 제한 법리 위반 여부에 대한 판단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상표 라이선스가 거래 사회의 구조적 특성으로서 일정한 제한 조건이 수반되는 계약 유형에 해당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데 그쳤습니다.
판결의 실무적 함의 — 제약·바이오 라이선스 계약을 중심으로
본 판결은 영국법 준거 라이선스 계약 전반에 적용되는 것이나, 특히 제약·바이오 기술이전·라이선스 계약 실무에서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갖습니다.
1. "indefinitely"와 "perpetually"의 구분은 필수
글로벌 제약·바이오 라이선스 계약에서는 기술의 지속적 활용을 위해 장기 라이선스를 구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때 계약의 존속을 어떤 표현으로 규정하느냐가 해지권의 존부를 결정합니다. 본 판결 이후, 영국법을 준거법으로 하는 계약에서 "indefinitely"는 합리적 통지에 의한 해지권을 수반하는 것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라이선서 입장에서 라이선시의 일방적 해지를 방지하고자 한다면, 더 명시적인 표현 또는 구체적 해지 사유 열거가 필요합니다.
2. 비대칭적 해지 조항에 대한 재검토
라이선서에게만 해지권을 부여하고 라이선시의 해지권에 침묵하는 구조는 실무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본 판결은 이러한 침묵이 반드시 라이선시의 해지권 부재를 의미하지 않음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특히 계약 기간이 장기에 걸쳐 분쟁 없이 유지되어 왔더라도, 라이선시는 합리적 통지를 통해 계약에서 이탈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습니다.
3. 합리적 통지 기간의 명시
본 판결 하에서 "합리적 통지 기간(reasonable notice period)"이 구체적으로 얼마인지는 향후 분쟁의 여지로 남습니다. 계약서에 해지 통지 기간을 명시하지 않으면 이를 둘러싼 새로운 분쟁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계약 체결 시 해지 통지 기간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권고됩니다.
4. 기존 계약 포트폴리오의 재검토
영국법 준거 또는 영국 계약법 원칙을 수용한 라이선스 계약으로서 기간 조항에 "indefinitely" 또는 이에 준하는 표현이 사용된 경우, 상대방이 본 판결을 근거로 해지를 통보할 가능성을 인식하고 계약 포트폴리오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핵심 기술에 대한 독점 라이선스를 보유한 라이선서라면 이 리스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결론
Zaha Hadid 항소법원 판결은 계약서 문언 하나가 수천만 파운드의 법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증적 사례입니다. "영원히(forever)"와 "기간 불확정으로(indefinitely)"는 일상 언어에서 혼용되지만, 영국 계약법에서는 전혀 다른 법적 의미를 갖습니다. 제약·바이오 분야의 기술이전, 공동연구개발, 특허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거나 검토할 때, 해지 조항의 문언과 구조를 정밀하게 설계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계약서 초안 작성 단계에서의 법률 검토가 사후 분쟁 해결 비용보다 언제나 경제적임을 이 사건은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참조 판결 및 출처
사건명법원인용
| Zaha Hadid Ltd v. The Zaha Hadid Foundation(항소심) | England & Wales Court of Appeal (Civil Division) | [2026] EWCA Civ 192 (2026. 2. 27.) |
| Zaha Hadid Ltd v. The Zaha Hadid Foundation(원심) | England & Wales High Court (Chancery Division) | [2024] EWHC 3325 (Ch) (2024. 12. 20.) |
| Winter Garden Theatre (London) Ltd v. Millennium Productions Ltd | House of Lords | [1948] AC 173 |
| Quantum Advisory Ltd v. Quantum Actuarial LLP | Court of Appeal | [2021] EWCA Civ 227 |
본 글은 일반적인 법률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작성되었으며, 개별 사안에 대한 법률 자문을 구성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계약 검토 및 법률 자문은 담당 변호사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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